2020.02.24 - 04.21


목해원 임은섭

박민영 서강준


[책방일지]


굿나잇책방 블로그 비공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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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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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와서 좋은 이유는 그저 한 가지.


내 창을 가리던 나뭇잎이 떨어져

건너편 당신의 창이 보인다는 것.


크리스마스가 오고, 설날이 다가와서

당신이 이 마을로 며칠 돌아온다는 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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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린이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을 빌려 갔다.

그녀가 그 책을 좋아하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할 수 없겠지.


사실은 그 책의 시리즈 중 패트릭 벤슨의 삽화 버전을 가장 아낀다.

하지만 책들이 듣는 데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책에도 그림에도 귀가 있으니.


밤이 깊었습니다. 말이 길어졌네요.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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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와 같은 지붕 아래 잠들어 있는 그녀.

아까는 내 방에 들어와 책상에 놓인 구형 램프를 보고 아름답다고도.


순간 행복해진 나는, 불현듯 덜컥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으며 불꽃같은 고백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들 수 없어 그저 고마워, 라고만.


언제나 믿을 수 없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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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독서모임에서 겨울에 어울리는 시와 소설 중

마음에 드는 구절을 골라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제법 이 독서회에 잘 적응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회원들이 읽는 책을 따라 읽곤 한다.

문득 궁금해진 건 그녀는 책을 통해 그 사람을 궁금해하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책을 골라야 하는 걸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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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전에 아이린에게 했던 말들을 다시 생각해봄.

모든 첫사랑은 과거완료? 아아. 그때 나는 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지금 그녀가 다시 물어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대부분의 첫사랑은 과거완료지만, 나는 예외라고.

나는 아직 아무것도 완료되지 않았다고.


*

아이린이 꽃을 사왔다.

왜 동백꽃이냐 물으니 생전에 아버지가 좋아했던 꽃이라고.


그녀가 가끔 해주는 그녀의 가족 얘기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 든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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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은 작자 미상의 글을 읽고 싶다.

누가 썼는지 몰라 저작권료를 줄래야 줄 수 없는

정말 미안하고 소중한 이야기들.


먼 미래에도 작자 미상의 작품은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잊고 또 잊는 상실이 존재하는 한.


...휴, 사실은 좀 정신이 없다.

종일 구름 위를 걷는 기분.

뭔가 말하고 싶지만 좀 더 생각한 뒤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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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좋아."

아이린이 내게 말했다.

얼어버린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영겁의 시간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걸까.

그녀의 그 말 한마디에 온 우주는 멈췄고, 나도 멈춰버렸다.


애써 정신을 부여잡고 내 입에서 나온 거라고는 고작,

"그래..."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이 밤이 혹독하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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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일 때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고,

외로움에서 배우는 일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기대하는 바가 적을수록 생활은 평온히 흘러가니까

진정으로 원하는 게 생기는 건 괴롭다.


하지만, 나라고 욕망이 없을 리가.

산에서 아이린과 키스했다.

하마터면 정신이 나갈 뻔.


더 이상 농담으로 말할 수 없다는 건 심각하다는 뜻이다.

내 눈동자 뒤에 그녀가 살기 시작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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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무궁화 기차가 문제였다.


가을이었고 새벽이었고 플랫폼엔 단풍 나무가 있었고

그곳엔 그녀가 서 있었다. 새벽 기차가 멈춘 곳에 그녀가.


그러니 어떻게 안 반해.


사실 아이린과의 역사는 꽤 깊다.

열 살쯤, 그녀와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나는 아이린이 사내아이인 줄 알았음.


그렇죠.

생각보다 우리는 많은 페이지를 함께 했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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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나잇 책방을 열고 처음으로 이벤트를 열었다.

실질적으로 아이린이 리더였고

독서회 회원분들이 애정을 갖고 도와주셔서 무척 감사한 마음.


추억으로 남겨진 회원들 사진을 보니

얼마나 즐거웠는지 온전히 느껴져서 좀 질투가...


아이린은 지난해 말 내려왔을 때 보다 한결 밝아졌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전보다 잘 웃고 그늘도 옅어짐.

순간순간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눈이 부시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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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산에 사는 부랑자의 아들이었고

어느날 버려졌고

양부모님이 키워주셨다는 것.


정작 나 자신은 약점이라 생각하지 않아도

내가 그걸  아프게 여기길 바라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어째서 너는 불행해하지 않지?

너는 뒷산 오두막에서 살던 놈이 아니었던가?

네 아버지는 부랑자였잖아?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는 불행하고 슬퍼야 하나?

...한참 생각해봤지만 아니었다.


내게 고마운 사람들이 있는데

굳이 불행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결론.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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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너에게 쓰는 첫 연애편지.


그날, 내가 돌아본 창 너머에는

나처럼 상처받은 얼굴을 한 네가 있었고.


가고 싶다. 아니. 가면 안 돼. 미안하니까.

그런 거 전부 다 잊고 널 따라가게 되었어.


감나무가 많은 도시.

그곳엔 낙동강물이 맑게 흐르고 있었는데.

나는 네가 그곳에 뛰어들까 무서웠어.

너네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는데도 무서웠어.

죽어버릴까 봐.


그리고 그게 아마,

너와 나의 첫 번째 가을 여행이었다는 것.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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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린에게 비공개 일지를 들켰다. 이런.

책방일지 카테고리를 본 것 같은데

어디까지 읽었는지 모르겠다.


마시멜로 이야기로 나를 놀린 걸 보면

그녀가 북현리에 내려왔던 무렵이다.

그 이후로 어디까지...?


다 읽었다고 해도 뭐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지만.

왠지 음. 부끄러워서 정신을 잃을 뻔했음.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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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살아가는 길이

내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내가 존재해도 괜찮은,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방해도 받지 않는

누구에게도 거부당하지 않을 그런 곳을 찾아가는 것이

살아가는 일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어디든, 내가 머물고 있는 바로 이곳이

바로 나의 자리가 아닐까.


내가 나 자신으로만 살아간다면

나는 이곳에서 존재해도 괜찮을 것 같다.

...여기까지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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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계속하다 보면 오늘 날짜의 부피가 생긴다.

그렇게 포개지는 일상들은 딱히 변화를 선물하진 않았다.


그러다 올겨울 그녀가 내게 다가왔을 때,

우리가 서로 사랑을 나누었을 때,


그 날짜들은 더 이상 균일한 평안함으로 쌓이지 않고,

오늘의 부피는 이전과 달라졌다.


내년 겨울부터는 더 달라지겠지.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이제 다가올 겨울의 부피.


수일간 책방 문을 닫는다는 공지를 띄웠다.

신경이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같다.


잠시 내려놓고 쉬어가기로.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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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시 아이린을 만났다.

그토록 기다렸고 보고 싶었던 그녀인데


애써 마음을 숨기고 바라만 보던 나는

바보처럼 그냥 돌아서 버렸다.


그런 내게 달려와 풀썩 안겨 버린 그녀는

나의 꽁꽁 언 마음을

또다시 무장해제 시켜버렸다.


한동안 넋이 나간 채 멍한 상태였던 나날들.

다시 잠 못 이루던 지난날.


거짓말처럼 다시 과거가 되었네요.

야심한 시각, 힘들었을 그녀는 지금 내 팔을 베고 잠들었습니다.


그녀는 가볍고...

봄바람이 실어 오는 풀냄새처럼 좋은 향기가 납니다.

여러분, 여기는 다시 아카시아 향기가 만발합니다.

로저.







[Page 1]

1-8화 책방일지




[Page 2]

9-16화 책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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